유산, 금속활자본 ‘직지’

인간의 역사는 곧 '소통과 기록'의 역사다. 아득한 옛날 원시 시대의 인류가 동굴 벽에 남긴 거친 그림에서부터, 돌이나 진흙 판에 날카롭게 새겨진 쐐기문자, 나아가 파피루스와 양피지, 그리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구전(口傳)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지식을 더 정확하고 멀리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 왔다. 지식의 축적과 전파는 문명의 발전을 이끄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류의 거대한 기록 문화사에서, 한국인이 이룩한 ‘금속활자의 발명’은 인류 문명사에 유례없는 거대한 전환점을 찍은 혁명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세계사적 혁명의 중심에는 현존하는 세계 최古의 금속활자본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통칭 ‘직지(Jikji)’가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1. ‘직지’란 어떤 책인가: 그 이름과 내용의 진실

'직지'라는 이름은 줄임말이며, 정식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이 책은 고려말의 고승인 백운 화상(白雲和尙)이 부처와 역대 고승들의 가르침 중에서 참선(參禪)을 통해 마음의 본체를 바로 가리켜 보이는 핵심적인 내용만을 간추려 상·하권으로 편찬한 선불교(禪佛敎)의 교과서와 같은 서적이다.

'직지심체(直指心體)'라는 말은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관찰할 때, 그 마음의 본체가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선불교의 깊은 진리를 담고 있다. 즉, 인간 내면의 참된 본성을 깨닫는 지혜를 담은 기록인 것이다.

이 역사적인 책은 1377년(고려 우왕 3년) 7월, 충청북도 청주에 위치한 흥덕사(興德寺)에서 석찬(石璨)과 달잠(達暫)이라는 승려가 묘덕(妙德)이라는 여성 시주자의 경제적 지원과 정성으로 금속활자를 이용해 간행하였다.

2. 구텐베르크보다 78년 앞선 인류 최초의 금속활자 혁명

흔히 서양에서는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1455년에 인쇄한 《42행 성경》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물로 기억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역사적 사료와 과학적 증거가 증명하듯, 직지는 구텐베르크의 성경보다 무려 78년이나 앞선 1377년에 간행되었다.

14세기 이후 서양에서 일어난 르네상스, 종교 개혁, 그리고 근대 과학 혁명과 산업혁명 등 문명의 대변혁 뒤에는 지식의 대량 생산과 보급이라는 토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지식 정보화 혁명(Information Revolution)의 진정한 포문을 연 선구자는 바로 고려의 인쇄 기술이었다. 직지는 인쇄술이 단순한 기술적 발명을 넘어, 인류의 사상과 문화를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강력한 문명적 도약이었음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3. 타국에서 발견된 비극과 헌신: 직지가 프랑스에 건너간 이유

오늘날 직지의 원본은 대한민국이 아닌 프랑스 파리에 있는 프랑스 국립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 민족의 소중한 기록 유산이 왜 머나먼 유럽의 땅, 프랑스에 보관되어 있는 것일까?

구한말 고종 시대, 조선과 프랑스가 수교를 맺은 이후 초대 프랑스 공사로 부임했던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는 조선에 머무는 동안 다양한 고서와 골동품을 수집했다. 이때 그가 수집한 한국의 고서 목록 속에 직지가 포함되어 있었고, 그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이 책을 프랑스로 가져갔다.

이후 플랑시가 소장하던 유물들이 경매에 부쳐지면서, 프랑스의 유명한 골동품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Henri Vever)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앙리 베베르는 이 책의 희귀성과 가치를 알아보았고, 사후에 "자신이 수집한 소중한 문화재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로 인해 직지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수문장들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는 기증 도서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4.故박병선 박사의 위대한 발견과 금속활자의 증거들

오랫동안 세계 역사학계와 심지어 한국의 역사 속에서도 직지는 그저 잊혀진 이름에 불과했다. 이 책의 진면모를 세상 밖으로 극적으로 끌어낸 것은 파견 근무 중이던 한국의 역사가,故박병선 박사의 끈질긴 집념과 헌신이었다.

1967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서서히 잊혀 가던 책들을 정리하던 박병선 박사는 한국 서적 코너 구석에서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채 방치되어 있던 직지 하권 상·하책을 마주하게 되었다. 책을 펼쳐 들고 마지막 장의 간행 기록(Colophon)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는 문구를 발견하고는 온몸의 전율을 느꼈다.

하지만 세계 학계에 이를 증명하는 것은 쉽지 않은 길이었다. 그녀는 직지가 단순한 목판본(Woodblock print)이 아니라 금속활자본(Movable metal type print)임을 입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증거들을 찾아냈다.

• 마지막 장의 간행 기록(주자 鑄字 기록): 책의 말미에 주자(鑄字), 즉 금속을 부어 활자를 만들어 찍어냈음을 명시하는 기록이 명백하게 남아 있었다.

• 금속활자 특유의 인쇄 흔적: 나무 판각으로 새긴 목판본은 글자가 반듯하고 결이 고른 반면, 직지의 본문 글자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활자가 완벽하게 고정되지 않아 삐뚤어지거나, 먹이 고르게 묻지 않아 일부분이 흐리거나 비틀린 흔적, 심지어 글자가 뒤집혀 찍힌 자국들까지 고스란히 발견되었다. 이는 금속으로 만든 활자를 틀에 넣고 밀어내는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물리적 증거였다.

박병선 박사의 이러한 철저한 고증과 헌신적인 연구 덕분에, 직지는 마침내 전 세계 학계로부터 공식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공인받을 수 있었다.

5. 세계가 함께 기억하는 유산: 유네스코 직지상

직지가 지닌 인류사적 가치는 대한민국 국경을 넘어 전 세계의 공감을 얻었다. 2001년 4월, 유네스코(UNESCO)는 직지를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공식 등재하였다. 이는 직지가 가진 인쇄술의 역사적 독창성과 인류 문화 발전에 끼친 공헌을 국제사회가 온전히 인정한 결과였다.

유네스코는 이를 기념하고, 전 세계적으로 인류의 소중한 기록 유산을 보존·관리하는 데 헌신하는 개인이나 단체를 격려하기 위해 ‘유네스코/직지상(UNESCO/JIKJI Memory of the World Prize)’을 제정하였다. 직지의 고향인 청주시와 유네스코가 공동으로 수여하는 이 상은, 매년 전 세계 기록 문화 보존 운동가들에게 큰 영광이자 자부심이 되고 있다.

6. 세계인들의 찬사와 우리가 지켜나갈 역사적 사명

프랑스의 저명한 인문학자이자 교수인 베누아 켈러(Benoît Keller)는 직지를 마주한 후 다음과 같은 찬사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나는 직지에 관해 모든 것을 배웠고, 오늘은 내 인생 최고의 날이다."

이처럼 세계 각국의 학자와 언론인, 그리고 미래를 이끌어갈 청소년들은 직지를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가 단순히 경제적 성취만을 이룬 국가가 아니라, 아득한 중세 시대부터 인류의 지적 수평선을 넓혀온 고차원적인 문화 대국이었음을 깨닫고 감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다수의 글로벌 교과서나 대중매체는 인류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 발명품으로 구텐베르크의 성경을 단독으로 기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를 비롯한 수많은 한국의 청년들과 글로벌 시민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직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캠페인을 끊임없이 펼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는 저절로 기억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뜨거운 열정(박병선 박사)이 잊혀 있던 한국의 역사를 세계사의 중심무대로 끌어올렸듯, 이제는 우리 모두가 직지가 품고 있는 위대한 인류사적 가치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나아가 전 세계에 직지의 진실을 널리 알려, 인류 문명 발전의 가장 찬란한 출발점에 한국의 금속활자 기술과 정신이 있었음을 온 지구가 기억하도록 만들어야 할 시점이다.
직지의 역사와 세계화 프로젝트 더 알아보기
• 공식 사이트 바로가기: [http://jikji.prkorea.com](http://jikji.prkorea.com)

readers loved this